나의이야기/평등가족만들어요
평등부부상 평등하고 행복한 결혼준비를 위해
한국여성의전화
2011. 6. 16. 12:49
평등하고 행복한 결혼준비를 위해
최인수·장영석
우리 부부는 재산을 누구 이름으로 소유하고, 어떻게 나누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특별한 원칙을 만들어 두고 그에 따라 살지는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우리 재산을 사용해야 할 곳이 있으면, 그때 그때 의논해서 결정한다. 그 돈이 누가 노동력을 제공한 대가로 얻은 것이든, 누구의 수입이 더 많든 상관없이, 두 사람 모두 두 사람의 모든 재산에 대해 사용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1. 연애 시절
1991년, 나와 남편은 같은 대학을 다니면서 사귀게 되었고, 사귀면서 들어가는 비용은 돈이 있는 사람이 부담했다. 당시 나는 과외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있고, 못할 때도 있었고, 남편은 식당에서 일하든가 집에서 용돈을 받든가 했는데, 대개 한 사람이 돈이 있을 때는 다른 사람은 없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할 때(1993년)까지 2년 반 동안, 둘 중 한 사람이 아르바이트를 했던 기간은 서로 비슷했던 것 같다. 남녀가 사귈 때 누가 돈을 내는 게 좋은가 하는 문제는 우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대체로 가난했기 때문에 돈이 들 다른 일은 별로 하지 않았고, 학교에서 밥 먹는 것이 거의 전부였다.
남편은 나보다 1년 늦게 졸업했고, 졸업한 뒤 군대를 갔다. 고향에서 방위 복무를 했기 때문에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나는 자주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남편은 1995년 제대한 뒤 취직을 했고, 이듬해 우리는 결혼을 했다.
2. 결혼 과정
내가 직장을 다니면서 모은 돈 400만원이 우리 결혼 자금이었다. 남편도 직장을 다니며 적금을 붓고 있었지만, 결혼식을 위해 적금을 깰 만큼 큰 돈은 아직 아니어서 내 돈을 쓰기로 했다. 100만은 내 부모님, 100만원은 남편의 부모님께 드렸다. 그리고 130만원은 신혼여행비에 쓰고, 나머지는 반지와 우리 예복을 마련하는 데 썼다. 그때 깨지 않은 남편의 적금은 1년 후 내가 예금주가 되었다.
혼수를 하기는 했는데, 일부러 따로 비용을 책정해서 마련한 건 없다. 살림은 대개 자취할 때 쓰던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냉장고가 소형이고 냉동실이 따로 없어 불편했는데, 그건 결혼한 지 2년 후에 새 것으로 마련했다. 밥솥은 3년쯤 후에 쓰던 것이 너무 낡아 다시 샀다. 세탁기는 없었는데(지금도 손빨래를 가끔 하는데, 남편 담당이다), 결혼식 후에 축의금이 남았다며 내 아버지께서 사주셨다. 언니가 결혼 선물로 비디오를 사주어서, 그 김에 남편이 텔레비전을 할부로 샀다. 대학 선배가 식기건조기를 선물해 주었다. 내 어머니가 갖고 계셨던 도자기 그릇들과 수저 한 세트를 주셨다. 내 이모가 홑이불을 두 채 사주셨다.
시댁의 가족과 친척에게 주어야 한다는 혼수를 하기는 했다. 남편은 시댁에게 혼수는 없을 거라 미리 말해 두었는데, 이모가 동대문 시장에서 우리 이불을 사시는 김에 홑이불을 일곱 채 더 사다 억지로 안기시는 바람에, 시형제자매에게 주었다. 우리 두 사람의 예물은 금반지를 각각 3돈씩 동네 금은방에서 했다. 시형제자매들은 돈을 모아 폐백 때 우리에게 신혼여행 가서 쓰라고 100만원을 주었다.
결혼식은 시부모님의 강력한 요구와 내 부모님의 순순한 응락으로 시댁이 있는 광주에서 했다. 결혼식장은 시부모님께서 정하신 곳으로 했다. 남편은 생활한복 정장에 두루마기를 입고, 나도 한복에 머리에는 아얌을 썼다. 우리 두 사람이 손잡고 같이 들어와 같이 나갔다. 주례 없이 우리 두 사람이 만든 서약서를 사람들 앞에서 읽고, 두 집 부모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두었다. 서약서에는 따로 또 같이 살아가는 두 사람이 앞으로 모든 것을 돕고 나눌 것을 적었고, 같이 서명도 했다. 그 서약서는 지금 장롱 깊숙한 곳에 보관하고 있다.
결혼식장 빌리고, 원판 사진 10장 찍고, 양가 부모님 가슴에 꽂는 꽃, 나중에 사진 찍을 때 내가 든 부케(결혼식장 입장하고 퇴장할 때는 꽃을 들지 않았다) 마련하는 데 모두 109만원이 들었는데, 그건 결혼식장을 광주에 유치(!)하신 시부모님께서 내셨다. 그리고 내 부모님께선 친척과 손님들을 광주로 실어 나르고 다시 수원으로 돌아오는 데 필요한 관광버스 2대 임대료를 부담하셨다. 각기 손님들 점심을 대접한 비용은 양가 부모님께서 축의금으로 해결하셨다.
전셋집은 시부모님께서 주신 2000만원으로 구했다. 그리고 나중에 이사하면서 다시 1000만원을 얻었다. 장기 무이자로 빌린 것이다. 그 중 현재까지 800만원을 갚았다. 그 동안 우리가 같이 살면서 5년간은 내 이름으로, 최근 1년간은 남편 이름으로 전셋집을 계약했다. 집을 구하러 많이 돌아다닌 사람이 계약을 한 것뿐이다.
3. 결혼 후
내 남동생은 작년 봄에 대학을 졸업했다. 2학년 2학기부터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을 나와 내 여동생이 나누어 냈다. 그래서 각자 2학기, 마지막 학기는 두 사람이 같이 등록금을 부담했는데, 1998년부터 약 600만원이 들었다.
양쪽 집안의 행사나 명절 때 들어가는 비용에 기준을 따로 정하지는 않고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만큼 사용한다. 대개 양가 부모님 생신 때는 생신을 맞으신 분을 위해 10만원을 쓴다. 그리고 설날이나 추석 때는 한 집에 10만원씩 드린다. 이제 우리 수입이 나아지면 좀더 드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카들에게 세뱃돈은 주지 않고, 대신 설날과 추석 때마다 책을 한 권씩 골라 선물한다. 해마다 한 명에게 책을 두 권씩 선물하는 셈이다.
나는 회사를 다니다가 간간이 힘이 들어 쉬기도 했고, 그때는 남편의 수입으로 생활을 했고, 남편이 회사를 그만두었을 때는 내 수입으로 생활을 했다.
지금 나의 수입은 남편보다 훨씬 많다. 네 배도 넘는 차이 - 내가 많이 버는 게 아니라,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고 지금 하는 일(공인노무사 사무실 공동 운영) 자체가 수입이 매우 적어서이다 - 가 난다. 그래서 내가 지출을 많이 한다. 지금 두 사람은 비슷한 액수가 매월 들어가는 적금과 보험을 각자의 이름으로 가지고 있다.
통장은 각자가 관리한다. 둘 다에게 해당되는 비용(제세공과금, 통신비 등)은 모두 남편 통장에서 결제가 된다. 하나로 관리하는 것이 편리하기 때문이다. 전에는 내 통장에서 나가도록 되어 있었는데, 작년에 남편이 여러 가지 조건이 유리한 카드를 새로 만들면서 그쪽으로 옮겼다. 돈이 부족하면, 나보고 달라고 해서 결제한다.
그리고 각자가 필요한 비용은 각자 알아서 판단해서 지출하고, 그 액수가 크다거나 특별한 일일 경우에는 미리 의논한다. 예를 들면, 나는 올해 여름에 중국 동북 지방을 여행하는 고구려 유적 답사단에 참가했는데(남편은 안 가고 나 혼자서), 그 일을 위해 작년 11월부터 월 10만원씩 돈을 모으겠다고 남편에게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같이 생활 비용을 줄였고, 월 10만원씩 모은 것만 가지고는 실제 여행하는 데 모자랐기 때문에 앞으로 상당 기간은 계속 다른 지출을 줄여야 한다.
우리는 아직 가진 게 없어서인지 공동 명의로 할 만한 게 없다. 굳이 하나 있다면 전셋집 계약서인데, 공동 명의로 하지 않았다. 그냥 계약하러 간 사람 이름으로 했다. 지금 남편 이름으로 되어 있다고 해서 그게 남편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데, 예전에 내 이름으로 되어 있다고 전셋집이 내 것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과 같다. 만약 앞으로 집을 산다면 공동 명의로 하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은 든다. 그런데 우리 두 사람은 모두, 생산수단과 토지 따위 부동산은 사적인 소유가 철폐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실 전셋집도 자기 명의로 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 서로 상대방 이름으로 하라고 미루곤 하는데, 험한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 나가는 것은 현실이니, 그렇게 생각할 일만도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