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명의실천상 부부공동재산명의가 가져온 가족평등문화


부부공동재산명의가 가져온 가족 평등문화


박 미 영

우리 부부는 95년 아름다운 가을날 야외 결혼식을 했다. 이제 결혼한지 만 7년이 되었다.
"단점을 개성으로 받아들이는 사랑과 존경이 넘치는 평등한 가족공동체를 만들자" 남편이 내게 청혼할 때 한 말이다. 물론 빈말이 아니었다. 남편은 나의 작은 장점은 크게 부각시켜서 자신감을 심어주고 단점은 개성으로 승화시켜서 기를 살려주었다. 그리고 아내, 어머니, 며느리 입장보다는 나를 한 개인의 인격으로 보고 어떻게, 무엇을 하면 좀더 값진 인생을 살까 진심으로 고민해 주었다.

그러나 문제도 컸다. 특히 가사노동분담이 그랬다. 결혼 후 처음 일주일씩 가사노동전담제를 했는데 문제가 생겼다. 내가 가사노동을 결혼 전까지 15년 이상 경험한 것에 비하면 남편은 결혼하기 전에 대부분 남자들이 그렇듯 가사노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남편이 청소와 빨래를 할 테니 식사는 나에게 전담하자고 제안을 했다. 나는 생각이 달랐다. 한두 달하고 그만 둘 일이 아니기 때문에 배우고 몸에 익혀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우리는 일주일 전담제를 계속했는데 남편이 당번 때는 반찬을 시장에서 사오는 거였다. 생각은 여느 남편보다 나은데 행동은 여느 남편만 못하는 것이었다.

가사노동에 대해서 남편의 자람은 더디었다. 그래도 가사노동전담이 틀이 잡혀가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첫아기(지연)를 출산하고 4개월이 되던 날 해고를 당했다. 하루아침에 전업주부가 되면서 가사노동을 전담하는 위치로 변했다. 내가 전업주부가 되고 남편이 하는 집안 일이란 가스렌지 청소와 쓰레기 치우는 것, 그리고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며 놀아주는 일 정도였다. 그나마 남편이 너무 바빠진 이후엔 시키지 않는다.

전업주부가 되면서 나 자신이 왜소해지는 것을 많이 느낄 수 있었다. 정신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내가 생각한 결혼은 그랬다. 경제력은 한사람에게 부담 지우지 말고 서로 나누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계획에 없던 해고를 당하면서 "아이는 유아일 때 부모의 사랑이 필요하므로 아이가 세 살 될 때까지 육아에 전념하자"고 생각했다. 그 사이에 둘째(서현)가 태어났고 서현이가 세 돌이 될 때까지 전업으로 육아를 하기로 하였다. 엄마 못지 않게 아빠의 관심과 애정도 중요하므로 남편도 하루 1시간씩은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그러나 남다를 노력에도 불구하고 잘 지켜지지는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이 가족의 희생 없이 성장 할 수 없음을 전업주부 생활을 통해 뼈저리게 느꼈다.

결혼하고 2번의 전세생활을 했다. 결혼 5년째 들어 또 다기 전셋집을 구하는 데 마침 불어닥친 전세대란으로 발이 붓도록 돌아다녀도 집을 구할 수 없었다. 우리는 큰 맘 먹고 관악산 아래 작은 아파트를 전매로 구입했다. 시부모님이 보태주시고 배보다 배꼽(대출금)이 더 컸지만, 그 기쁨이란...
처음 등기를 할 무렵 세무사에게 상담을 했다. 부부공동명의로 등기를 할 경우 세금을 내야한다, 서류가 복잡하다 등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특별한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남편에게 부부재산 공동명의를 제안했다. 처음에는 좀 주저되었다. 우리가 벌어서 집을 장만한 것도 아니고, 시부모님에게 도움을 크게 받았기 때문이다. 전업주부로 위축(?)이 많이 되었던 모양이다. 용기를 내어 남편에게 말했다.

"전업주부는 우리들이 상의하고 선택한 거예요. 경제적인 측면이랑 아이를 기르는 문제를 함께 고려해서 그러면 아이들이 좀 자랄 때까지 나는 집안일을 하자하고 지금까지 온건대 내가 한 가사노동을 인정 안 하면 안되죠" "재산 또한 부부공동생활 중 하나인데 남편이 죽으면 자식과 같은 위치에서 상속을 받는다는 것이 부부가 평등한 것이 아니지요?"
처음에 남편은 좀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나의 주장에 남편은 선선히 동의를 했고, 우리는 부부 공동명의로 재산등기를 했다. 2000년 10월의 일이다.

우리는 이 일을 계기로 사회에서의 양성평등만이 아니라 가족에서의 양성평등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로만이 아니라 가족 속에서 실천하는 양성평등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혼 초기의 "사랑과 존경이 넘치는 평등한 가족공동체"를 만들어 가자는 약속이 "부부재산 공동명의"로 열매를 맺은 것이다.
전업으로 아이들을 키우면서, 미래에 대해 초조해 하지 않고 즐거운 전업주부로 생활할 수 있었던 것에는 남편의 이해와 지지가 컸다. 육아문제는 개인, 가족단위에게 맡겨진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이며 그래야 양성평등의 날도 앞당길 수 있음을 5년의 전업주부 생활을 통해 절감했다. 올해 방송대학교 유아교육과를 졸업했다. 육아의 경력을 바탕으로 여성운동의 한 방향으로써 유아교육에 전망을 세우고 있다.
내년 3월이면 서현이가 세 돌이다. 나는 이제 전업주부 생활을 끝내고 일을 시작하려 한다.
그래서 올해는 자원봉사를 일주일에 하루하고, 그리고 내 공부를 하루씩하고 있다. 나는 결혼을 하고 난 후에 인생에 대해 이전보다 자신감을 갖고, 미래를 설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