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부부상 평등하고 행복한 결혼준비를 위해


평등하고 행복한 결혼준비를 위해


최인수·장영석

우리 부부는 재산을 누구 이름으로 소유하고, 어떻게 나누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특별한 원칙을 만들어 두고 그에 따라 살지는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우리 재산을 사용해야 할 곳이 있으면, 그때 그때 의논해서 결정한다. 그 돈이 누가 노동력을 제공한 대가로 얻은 것이든, 누구의 수입이 더 많든 상관없이, 두 사람 모두 두 사람의 모든 재산에 대해 사용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1. 연애 시절
1991년, 나와 남편은 같은 대학을 다니면서 사귀게 되었고, 사귀면서 들어가는 비용은 돈이 있는 사람이 부담했다. 당시 나는 과외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있고, 못할 때도 있었고, 남편은 식당에서 일하든가 집에서 용돈을 받든가 했는데, 대개 한 사람이 돈이 있을 때는 다른 사람은 없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할 때(1993년)까지 2년 반 동안, 둘 중 한 사람이 아르바이트를 했던 기간은 서로 비슷했던 것 같다. 남녀가 사귈 때 누가 돈을 내는 게 좋은가 하는 문제는 우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대체로 가난했기 때문에 돈이 들 다른 일은 별로 하지 않았고, 학교에서 밥 먹는 것이 거의 전부였다.

남편은 나보다 1년 늦게 졸업했고, 졸업한 뒤 군대를 갔다. 고향에서 방위 복무를 했기 때문에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나는 자주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남편은 1995년 제대한 뒤 취직을 했고, 이듬해 우리는 결혼을 했다.

2. 결혼 과정
내가 직장을 다니면서 모은 돈 400만원이 우리 결혼 자금이었다. 남편도 직장을 다니며 적금을 붓고 있었지만, 결혼식을 위해 적금을 깰 만큼 큰 돈은 아직 아니어서 내 돈을 쓰기로 했다. 100만은 내 부모님, 100만원은 남편의 부모님께 드렸다. 그리고 130만원은 신혼여행비에 쓰고, 나머지는 반지와 우리 예복을 마련하는 데 썼다. 그때 깨지 않은 남편의 적금은 1년 후 내가 예금주가 되었다.

혼수를 하기는 했는데, 일부러 따로 비용을 책정해서 마련한 건 없다. 살림은 대개 자취할 때 쓰던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냉장고가 소형이고 냉동실이 따로 없어 불편했는데, 그건 결혼한 지 2년 후에 새 것으로 마련했다. 밥솥은 3년쯤 후에 쓰던 것이 너무 낡아 다시 샀다. 세탁기는 없었는데(지금도 손빨래를 가끔 하는데, 남편 담당이다), 결혼식 후에 축의금이 남았다며 내 아버지께서 사주셨다. 언니가 결혼 선물로 비디오를 사주어서, 그 김에 남편이 텔레비전을 할부로 샀다. 대학 선배가 식기건조기를 선물해 주었다. 내 어머니가 갖고 계셨던 도자기 그릇들과 수저 한 세트를 주셨다. 내 이모가 홑이불을 두 채 사주셨다.

시댁의 가족과 친척에게 주어야 한다는 혼수를 하기는 했다. 남편은 시댁에게 혼수는 없을 거라 미리 말해 두었는데, 이모가 동대문 시장에서 우리 이불을 사시는 김에 홑이불을 일곱 채 더 사다 억지로 안기시는 바람에, 시형제자매에게 주었다. 우리 두 사람의 예물은 금반지를 각각 3돈씩 동네 금은방에서 했다. 시형제자매들은 돈을 모아 폐백 때 우리에게 신혼여행 가서 쓰라고 100만원을 주었다.

결혼식은 시부모님의 강력한 요구와 내 부모님의 순순한 응락으로 시댁이 있는 광주에서 했다. 결혼식장은 시부모님께서 정하신 곳으로 했다. 남편은 생활한복 정장에 두루마기를 입고, 나도 한복에 머리에는 아얌을 썼다. 우리 두 사람이 손잡고 같이 들어와 같이 나갔다. 주례 없이 우리 두 사람이 만든 서약서를 사람들 앞에서 읽고, 두 집 부모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두었다. 서약서에는 따로 또 같이 살아가는 두 사람이 앞으로 모든 것을 돕고 나눌 것을 적었고, 같이 서명도 했다. 그 서약서는 지금 장롱 깊숙한 곳에 보관하고 있다.

결혼식장 빌리고, 원판 사진 10장 찍고, 양가 부모님 가슴에 꽂는 꽃, 나중에 사진 찍을 때 내가 든 부케(결혼식장 입장하고 퇴장할 때는 꽃을 들지 않았다) 마련하는 데 모두 109만원이 들었는데, 그건 결혼식장을 광주에 유치(!)하신 시부모님께서 내셨다. 그리고 내 부모님께선 친척과 손님들을 광주로 실어 나르고 다시 수원으로 돌아오는 데 필요한 관광버스 2대 임대료를 부담하셨다. 각기 손님들 점심을 대접한 비용은 양가 부모님께서 축의금으로 해결하셨다.

전셋집은 시부모님께서 주신 2000만원으로 구했다. 그리고 나중에 이사하면서 다시 1000만원을 얻었다. 장기 무이자로 빌린 것이다. 그 중 현재까지 800만원을 갚았다. 그 동안 우리가 같이 살면서 5년간은 내 이름으로, 최근 1년간은 남편 이름으로 전셋집을 계약했다. 집을 구하러 많이 돌아다닌 사람이 계약을 한 것뿐이다.

3. 결혼 후
내 남동생은 작년 봄에 대학을 졸업했다. 2학년 2학기부터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을 나와 내 여동생이 나누어 냈다. 그래서 각자 2학기, 마지막 학기는 두 사람이 같이 등록금을 부담했는데, 1998년부터 약 600만원이 들었다.

양쪽 집안의 행사나 명절 때 들어가는 비용에 기준을 따로 정하지는 않고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만큼 사용한다. 대개 양가 부모님 생신 때는 생신을 맞으신 분을 위해 10만원을 쓴다. 그리고 설날이나 추석 때는 한 집에 10만원씩 드린다. 이제 우리 수입이 나아지면 좀더 드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카들에게 세뱃돈은 주지 않고, 대신 설날과 추석 때마다 책을 한 권씩 골라 선물한다. 해마다 한 명에게 책을 두 권씩 선물하는 셈이다.

나는 회사를 다니다가 간간이 힘이 들어 쉬기도 했고, 그때는 남편의 수입으로 생활을 했고, 남편이 회사를 그만두었을 때는 내 수입으로 생활을 했다.

지금 나의 수입은 남편보다 훨씬 많다. 네 배도 넘는 차이 - 내가 많이 버는 게 아니라,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고 지금 하는 일(공인노무사 사무실 공동 운영) 자체가 수입이 매우 적어서이다 - 가 난다. 그래서 내가 지출을 많이 한다. 지금 두 사람은 비슷한 액수가 매월 들어가는 적금과 보험을 각자의 이름으로 가지고 있다.

통장은 각자가 관리한다. 둘 다에게 해당되는 비용(제세공과금, 통신비 등)은 모두 남편 통장에서 결제가 된다. 하나로 관리하는 것이 편리하기 때문이다. 전에는 내 통장에서 나가도록 되어 있었는데, 작년에 남편이 여러 가지 조건이 유리한 카드를 새로 만들면서 그쪽으로 옮겼다. 돈이 부족하면, 나보고 달라고 해서 결제한다.

그리고 각자가 필요한 비용은 각자 알아서 판단해서 지출하고, 그 액수가 크다거나 특별한 일일 경우에는 미리 의논한다. 예를 들면, 나는 올해 여름에 중국 동북 지방을 여행하는 고구려 유적 답사단에 참가했는데(남편은 안 가고 나 혼자서), 그 일을 위해 작년 11월부터 월 10만원씩 돈을 모으겠다고 남편에게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같이 생활 비용을 줄였고, 월 10만원씩 모은 것만 가지고는 실제 여행하는 데 모자랐기 때문에 앞으로 상당 기간은 계속 다른 지출을 줄여야 한다.

우리는 아직 가진 게 없어서인지 공동 명의로 할 만한 게 없다. 굳이 하나 있다면 전셋집 계약서인데, 공동 명의로 하지 않았다. 그냥 계약하러 간 사람 이름으로 했다. 지금 남편 이름으로 되어 있다고 해서 그게 남편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데, 예전에 내 이름으로 되어 있다고 전셋집이 내 것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과 같다. 만약 앞으로 집을 산다면 공동 명의로 하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은 든다. 그런데 우리 두 사람은 모두, 생산수단과 토지 따위 부동산은 사적인 소유가 철폐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실 전셋집도 자기 명의로 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 서로 상대방 이름으로 하라고 미루곤 하는데, 험한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 나가는 것은 현실이니, 그렇게 생각할 일만도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