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부부상 평등한 결혼 준비

평등한 결혼 준비


김 인 숙

우리 나라에서는 성인이 된 남녀가 만나 결혼을 하는데도 결혼 당사자의 의사보다도 부모의 의사가 더 중시된다. 그런데 부모는 기성세대이기 때문에 보수적 성향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부모가 주도하는 결혼과정은 전통적인 남녀불평등을 자연스럽게 후세대로 이어주는 역할을 해온 것이다.
우리의 전통사회에서는 남녀불평등이 당연시되었기 때문에 가족구조뿐만 아니라 결혼과정에서도 남녀는 평등하지 않았다. 그래서 딸을 시집보내면 대들보가 휘청거린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유행한 것이다.
남편과 나는 6개월 정도 동거를 하다가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그래서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커플들과는 달리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고 결혼을 준비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 점이 우리 부부가 남녀의 차별 없이 결혼준비를 할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둘 다 직장생활을 오래 한 것이 아니라서 사실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금전적으로 힘들었다. 그렇지만 둘 다 자립심이 강한 편이라서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 보니 지나치게 형식을 좇는 과정은 생략하고 앞으로의 결혼생활에 실질적으로 필요한 것 위주로 준비하게 되었다.
우선 결혼준비는 예식장을 잡는 일부터 시작했다. 예식장의 예약비용은 같이 부담하고, 나머지 비용은 사정상 결혼식 축의금에서 충당하기로 했다. 예식장 사용료는 양가에서 반반씩 부담하고, 음식값은 양가의 손님 수에 비례해서 나눠 내기로 했다.
예식장 예약을 마친 다음에는 우리가 결혼식을 올리고 난 뒤에 살 집을 구하러 다녔다. 나는 그때 이미 임신 5개월이라서 직장을 휴직하고 있었고, 남편은 휴가를 내어 같이 집을 보러 다녔다. 집 값은 내가 살던 집의 전세금과 주택자금대출로 해결했다. 사실 집 값에서 대출금을 뺀 돈은 내가 마련한 것이니 집을 얻는 과정은 평등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지만 남편이 졸업하고 취직한지 얼마 안되었기 때문에 그 점은 내가 이해하기로 했다.
예물과 예단은 서로 현품으로 교환하지 않고 같은 액수의 돈으로 직접 교환했다. 예물 구입할 돈을 양가 부모로부터 받아서 둘이 잘 아는 금은방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했고, 예단은 같은 액수의 돈을 양가가 교환해서 직접 준비하셨다.
마지막으로 가전제품과 가구들은 결혼식에서 폐백 드릴 때 받은 돈으로 마련했다. 고가의 제품보다는 우리 두 식구가 사는데 알맞은 크기와 집의 평수를 고려해서 실속있게 구입했다. 가전제품과 가구들은 우선 꼭 필요한 것만 사고, 살아가면서 여유가 생기면 하나씩 구입하기로 했다.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우리는 결혼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양가 부모에게 거의 의존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평등한 결혼준비가 가능했다고 본다.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의 남녀차별은 마치 여자가 돈에 팔려 결혼한다는 느낌을 줌으로써 여성의 지위를 결혼생활의 출발점에서부터 불리하게 만든다. 사회적으로 완전 독립된 성인 남녀가 만나 부모의 간섭과 도움으로부터 벗어나서 결혼준비를 하는 것은 평등한 결혼생활의 출발점인 것이다.

평등부부상 믿음과 배려로 준비하는 결혼


믿음과 배려로 준비하는 결혼


박 선 아

저희는 이제 결혼 1년하고도 10개월을 맞이하고 있는 새내기 부부입니다.

벌써 시간이 그리 흐르다니 순간 놀라면서도, 아직도 채 적응치 못한 서로의 낯선 점에 당황스러워 하는걸 보면 아직 갈 길이 멀구나 싶은 생각에 오히려 '안도감'같은 게 든답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편안하고 든든한 반려자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시간이 아직은 많이 남았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남들 부부보다 더 많이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해야 하는 이유는 남편이 저보다 두 살 어리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는 두살의 터울을 인식하지 못할정도로 남편은 늘 저보다 의젓하고 든든한 가장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고,늘 친구 같은 우리부부이지만 한켵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는것은 혹시나 나보다 어리다는 이유로 그냥 하는 말 한마디에도 서로가 상처 받지 않을까 염려되는 이유입니다.

전 7형제중의 막내였고 어렸을 적부터 나름대로 부모님의 기대와 사랑을 한 몸에 받아 온 터라 제 결혼에 대한 부모님의 기대 또한 오히려 부담스러울 정도였습니다. 그 부담감이 어쩌면 결혼에는 무관심한 제 젊은 날을 만들었을테고, 결국은 아주 늦은 나이인 33에 운명적으로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부모님은 끝까지 제 선택을 믿어주셨답니다. 사실 저의 결혼을 지켜보면서 부모님은 마음이 많이 섭하시고 서운하셨더랬습니다.
우선은 기존의 6형제를 출가시키던 ‘결혼관’이 제게는 적용되지 않았거든요.

저와 제 남편은 불필요한 허례형식은 다 절제하고, 정말로 중요한 것을 지키며 합리적이고 실용적으로 결혼준비를 하자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전적으로 부모님의 힘을 빌어서가 아닌 우리 두 사람의 힘으로, 능력껏 그 안에서 결혼을 치루자는 게 우리의 뜻이었습니다.

서랍장 안에서만 잠자고 있을 불필요한 예물들, 그리고 입지도 못할 파티풍의 예복들, 신혼살림도 어차피 두 사람 다 혼자 부모님 떠나 자취생활을 해 오던 터이니 각자의 것을 모은 다음 필요한 것만 준비하고, 양가에 어쩌면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예단은 아예 없애고 자식으로서 이만큼 키워주신 부모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한복 한 벌씩 정성껏 해 드리자 했고, 숫가락 젓가락, 접시하나 그 모든 걸 다 우리 힘으로 준비한다 하니, 부모님들 보시기엔 젊은 사람들의 합리성이 예의범절에 어긋난다 보실 수도 있으셨겠지요~
더욱이 딸도 시집보내 보셨고,며느리도 맞아보셨던 양가 부모님들에겐 우리들의 제안이 대단히 파격적’인 것으로 받아 들이셨을 겁니다. 저희 부모님의 경우만 하여도 언니들 시집 보내시면서 한 짐 가득 예단이야 모야 준비하셨고, 며느리 받아보시면서 밍크코트 받아 보신적도 있으신 분인터라, 그러한 예단문화가 예의에 맞는 게 아니겠냐는 생각이 지배적이셨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지켜본 저는 두 사람이 새 출발하는 데 정말로 중요한 것인지, 가장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회의감이 들었고, 정작 제 결혼식에서만큼은 그런‘형식적’인 면은 절제하고 싶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처음 남편에게 제의했을 때, 남편 또한 흔쾌히 동의를 하였고 각자 서로의 부모님께 말씀을 드리자 했지요. 처음 저희 부모님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혀를 차셨지만, 저희 둘은 정말로 중요하게 지켜져야 할 것과 그냥 남 보기 좋을 형식적인 것 중 자식에게 더 우선시되는 게 무엇이겠냐며, 저흴 믿고 앞으로 잘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봐 달라는 말씀을 간곡히 드린 결과 마침내 아쉬운 듯 동의를 하시더군요~
어쩌면 아직까지 조금이라도 마음속에 아쉬움이 남아 있으신지는 모르겠지만, 단 한번도 시댁 어른이나 저희 부모님 저희들에게 싫은 내색을 보이시지 않았습니다. 그런 만큼 늘 부모님께 신뢰가는 모습을 보여 드리는 우리들의 작은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다 추억으로 떠 올려지지만, 신혼집에 퇴근 후 들어가 도배 대신 페인팅을 한다고 밤을 꼬박 샜던 일, 인터넷 뒤져가며 여기 저기 알아보고 신혼살림 구하러 다니던 일, 좁은 집에 들어갈 가구를 직접 디자인한답시고 골머리 앓던 일, 서로 직장에서 퇴근해서 결혼준비에 관해 의논할 시간과 장소가 없어 24시간 하는 불가마 찜찔방에 가서 남들 다 자는데 랜턴 켜 가며 둘이 머리 맞대고 의논하던 일, 결혼식 직전 모든 게 다 완성된 우리들의 신혼집을 보는 순간, 정말이지 우리 둘은 너무나 뿌듯했던 그 감격이 아직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합니다.

저희 부부는 맞벌이긴 하지만, 요즘 유행한다는 각자 수입은 각자가 관리한다는 식은 아닙니다. 남편의 급여도 일단 제게 입금이 되어 일괄적으로 제가 관리하는 것이지만, 매달 가계부나 적금의 관리는 공동으로 하고 있습니다. 한 달에 한번 저희 부부는 컴퓨터 앞에 앉아 적금정리를 하고, 수입지출에 관한 가계부를 같이 쓰고 있답니다~
가계부를 같이 운용하는 것은 아주 작은 일이지만, 부부의 신뢰부분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적금 운용을 같이 관리하면서 부부, 가족의 미래에 관해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장이 될 수 있고, 가계부 공동 관리도 부부의 자산에 관한 공동의식을 느끼면서 가족의 책임과 신뢰를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 같습니다.

부부는 서로 다른 둘이 만나 하나가 되어 한곳을 바라보는 것이라 했던가요~
그러나 그렇게 한곳을 바라보는 부부가 되기 전, 각자 평행선에서 다른 곳을 보는 상대방을 편안한 마음과 믿음으로 이해해 줄 수 있는 '배려'가 먼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노력 가운데 어느덧 한곳을 바라보게 보는 평형선의 우리 부부를 기대해봅니다.

평등부부상 두근두근, 톡톡, 방긋~~

두근두근, 톡톡, 방긋~~


신 영 호

저흰 학교 선후배로 만났습니다.
물론, 제가 군 제대하구 복학하기 전에 잠깐 학교에 올라갔다가 한눈에 반해서 치밀한 작전과 계략(?)으로 맘을 여는 데 성공했죠.
그리고, 남들과 똑같으면서도 우리 둘만의 바퀴벌레식(?!) 사랑을 키워 갔구요, 둘이 한번의 잠시 헤어짐을 경험하구 드뎌 비온 뒤에 땅 굳어진다는 말처럼 다른 사람 눈치 안보구 한집, 한 이불에서 살 궁리를 하고 있습니다.

근데, 결혼이라는 게 정말 둘만의 문제가 아니더군요.
저희 둘은 별로 형식적인 걸 중요시 하는 게 아니라서 간소하면서도 우리 둘만을 위한 결혼을 하고 싶은데 그게 쉽지 만은 않더군요.
일단, 상견례를 무사히 마치고 장모님께서 좋은 날을 받아오시고 조금씩 결혼준비에 들어갔습니다. 가장 먼저 결혼식장 잡는 문제부터 걸리더군요.
전 개인적으로 정신없이 하는 예식장 결혼은 별로 였던 터라 다른 방법의 결혼식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양가 부모님은 남들 하는 거 처럼 하지 왜 그러냐시냐면서 서로의 집 근처에 예식장을 잡기를 바라셨습니다. 첫 번째 고비 아닌 고비가 찾아온 거지요.
물론, 대부분 남자쪽에서 예식장을 잡아서 하니까 저희 부모님은 완강히 고향에 내려와서 하시길 바라셨습니다. 저희 형들 모두 그렇게 또 했구요.

일단, 제가 저희 집의 양보를 일단 이끌어 냈습니다.
제가 집의 막내란 점, 그리고 제 신부가 장녀란 점을 강조하면서 첫째를 시집 보내는 사돈댁의 맘을 헤아려 줘야 하지 않겠느냐..? 신랑, 신부 직장이 다 서울인데 서울에서 하는게 낫지 않느냐..? 손해 보는 거 같지만 우린 이쁜 딸 하나 더 얻는 거지 않느냐.?
다행히 [팔불출]이란 놈 소리 하시면서 서울에서 예식 하는 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더 절 기쁘게 했던 것은 저희 둘이 알아서 사돈댁과 상의해서 예식방법도 정하라고 하셨습니다. 팔불출 짓 하는 거 얼마나 더 하는 지 두고 본다 하시면서.
다행히 장인, 장모님도 한번에 허락은 안해 주셨지만 제가 "제가 지금 가진 게 별로 없어서 정말 남들 못지 않게 이쁘고 우아한 결혼을 해 주고 싶지만 그렇게 해주지 못하고, 결혼식 그날만은 왕비처럼 만들어 주고 싶습니다."라면서 [궁중혼례]를 하겠다고 하니까 허락을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궁중혼례]로 전 왕으로 제 신부는 왕비로 그날 만큼은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으며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 결혼식날 오시면 꼭 저희 둘을 위해서 만세 부르셔야 합니다.
이제 한고비 넘기고 집 장만 하면서 조금씩 준비하면 되겠다 싶었는데 이젠 예물, 예단이란 애물단지가 튀어 나오더군요.
다행히, 저희 집에서는 예단 잘해온다고 잘 사는 것도 아니고, 예단 없다고 못사는 것도 아니고 니 둘만 잘 살면 되니까 신경쓰지 말자고 하셨습니다.
한숨 놓으려는(예단문제로 결국 헤어지는 커플들이 너무 많아서) 순간 처가에서의 반발(?)이 심하더군요.
정말 해오지 말랬다고 안해 가서 나중에 딴 소리 들으면 어떡하냐..?
형수들이 해 온 게 있을 텐데 비교 되지 않겠느냐..?
정말 어렵더군요.
제가 아무리 말씀을 드려도 쉽게 안되더군요.
하긴 대부분의 결혼에서 그리고 여지껏 당신들이 보아 온 것을 어떻게 단번에 아니라고 하실 수 있겠습니까..?
결국, 예단 문제 만큼은 처가에서 하자는 대로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물은 다행히 둘이서 반지나 하나 맞추고 나머진 현금으로 보관하고 있다가 신혼 때의 갑작스런 돈 쓰임에 대비하기로 하고 이제 야외촬영 날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일단, 예단 문제만 빼곤 술술 풀리는 셈이지요..
평등부부로 살기에 앞서 평등하게 결혼 준비하는 거 둘만의 힘으로는 어렵더군요..
하지만, 둘이 노력해서 서로의 이해와 양보를 얻어내는 것 그것이 앞으로 평등부부로 살아가기 위한 초석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렇게 저희가 선례를 남겨 놔야 제 자식들, 가까이는 처제, 처남들의 본보기도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이제 결혼까지 두 달 남짓 남았습니다..
또 어떤 복병이 튀어 나올지 걱정되지만 전 이거 하나만 기억하면서 잘 해결해 나갈까 합니다.
손안에 있는 사탕을 놓아야만 항아리 속의 사탕을 더 많이 쥘 수 있다.
내 욕심을 많이 덜어내면 덜어낼수록 제 사랑이, 행복이 더 많이 들어올 거니까요..!!

평등부부상 평등하고 행복한 결혼준비를 위해


평등하고 행복한 결혼준비를 위해


최인수·장영석

우리 부부는 재산을 누구 이름으로 소유하고, 어떻게 나누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특별한 원칙을 만들어 두고 그에 따라 살지는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우리 재산을 사용해야 할 곳이 있으면, 그때 그때 의논해서 결정한다. 그 돈이 누가 노동력을 제공한 대가로 얻은 것이든, 누구의 수입이 더 많든 상관없이, 두 사람 모두 두 사람의 모든 재산에 대해 사용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1. 연애 시절
1991년, 나와 남편은 같은 대학을 다니면서 사귀게 되었고, 사귀면서 들어가는 비용은 돈이 있는 사람이 부담했다. 당시 나는 과외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있고, 못할 때도 있었고, 남편은 식당에서 일하든가 집에서 용돈을 받든가 했는데, 대개 한 사람이 돈이 있을 때는 다른 사람은 없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할 때(1993년)까지 2년 반 동안, 둘 중 한 사람이 아르바이트를 했던 기간은 서로 비슷했던 것 같다. 남녀가 사귈 때 누가 돈을 내는 게 좋은가 하는 문제는 우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대체로 가난했기 때문에 돈이 들 다른 일은 별로 하지 않았고, 학교에서 밥 먹는 것이 거의 전부였다.

남편은 나보다 1년 늦게 졸업했고, 졸업한 뒤 군대를 갔다. 고향에서 방위 복무를 했기 때문에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나는 자주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남편은 1995년 제대한 뒤 취직을 했고, 이듬해 우리는 결혼을 했다.

2. 결혼 과정
내가 직장을 다니면서 모은 돈 400만원이 우리 결혼 자금이었다. 남편도 직장을 다니며 적금을 붓고 있었지만, 결혼식을 위해 적금을 깰 만큼 큰 돈은 아직 아니어서 내 돈을 쓰기로 했다. 100만은 내 부모님, 100만원은 남편의 부모님께 드렸다. 그리고 130만원은 신혼여행비에 쓰고, 나머지는 반지와 우리 예복을 마련하는 데 썼다. 그때 깨지 않은 남편의 적금은 1년 후 내가 예금주가 되었다.

혼수를 하기는 했는데, 일부러 따로 비용을 책정해서 마련한 건 없다. 살림은 대개 자취할 때 쓰던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냉장고가 소형이고 냉동실이 따로 없어 불편했는데, 그건 결혼한 지 2년 후에 새 것으로 마련했다. 밥솥은 3년쯤 후에 쓰던 것이 너무 낡아 다시 샀다. 세탁기는 없었는데(지금도 손빨래를 가끔 하는데, 남편 담당이다), 결혼식 후에 축의금이 남았다며 내 아버지께서 사주셨다. 언니가 결혼 선물로 비디오를 사주어서, 그 김에 남편이 텔레비전을 할부로 샀다. 대학 선배가 식기건조기를 선물해 주었다. 내 어머니가 갖고 계셨던 도자기 그릇들과 수저 한 세트를 주셨다. 내 이모가 홑이불을 두 채 사주셨다.

시댁의 가족과 친척에게 주어야 한다는 혼수를 하기는 했다. 남편은 시댁에게 혼수는 없을 거라 미리 말해 두었는데, 이모가 동대문 시장에서 우리 이불을 사시는 김에 홑이불을 일곱 채 더 사다 억지로 안기시는 바람에, 시형제자매에게 주었다. 우리 두 사람의 예물은 금반지를 각각 3돈씩 동네 금은방에서 했다. 시형제자매들은 돈을 모아 폐백 때 우리에게 신혼여행 가서 쓰라고 100만원을 주었다.

결혼식은 시부모님의 강력한 요구와 내 부모님의 순순한 응락으로 시댁이 있는 광주에서 했다. 결혼식장은 시부모님께서 정하신 곳으로 했다. 남편은 생활한복 정장에 두루마기를 입고, 나도 한복에 머리에는 아얌을 썼다. 우리 두 사람이 손잡고 같이 들어와 같이 나갔다. 주례 없이 우리 두 사람이 만든 서약서를 사람들 앞에서 읽고, 두 집 부모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두었다. 서약서에는 따로 또 같이 살아가는 두 사람이 앞으로 모든 것을 돕고 나눌 것을 적었고, 같이 서명도 했다. 그 서약서는 지금 장롱 깊숙한 곳에 보관하고 있다.

결혼식장 빌리고, 원판 사진 10장 찍고, 양가 부모님 가슴에 꽂는 꽃, 나중에 사진 찍을 때 내가 든 부케(결혼식장 입장하고 퇴장할 때는 꽃을 들지 않았다) 마련하는 데 모두 109만원이 들었는데, 그건 결혼식장을 광주에 유치(!)하신 시부모님께서 내셨다. 그리고 내 부모님께선 친척과 손님들을 광주로 실어 나르고 다시 수원으로 돌아오는 데 필요한 관광버스 2대 임대료를 부담하셨다. 각기 손님들 점심을 대접한 비용은 양가 부모님께서 축의금으로 해결하셨다.

전셋집은 시부모님께서 주신 2000만원으로 구했다. 그리고 나중에 이사하면서 다시 1000만원을 얻었다. 장기 무이자로 빌린 것이다. 그 중 현재까지 800만원을 갚았다. 그 동안 우리가 같이 살면서 5년간은 내 이름으로, 최근 1년간은 남편 이름으로 전셋집을 계약했다. 집을 구하러 많이 돌아다닌 사람이 계약을 한 것뿐이다.

3. 결혼 후
내 남동생은 작년 봄에 대학을 졸업했다. 2학년 2학기부터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을 나와 내 여동생이 나누어 냈다. 그래서 각자 2학기, 마지막 학기는 두 사람이 같이 등록금을 부담했는데, 1998년부터 약 600만원이 들었다.

양쪽 집안의 행사나 명절 때 들어가는 비용에 기준을 따로 정하지는 않고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만큼 사용한다. 대개 양가 부모님 생신 때는 생신을 맞으신 분을 위해 10만원을 쓴다. 그리고 설날이나 추석 때는 한 집에 10만원씩 드린다. 이제 우리 수입이 나아지면 좀더 드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카들에게 세뱃돈은 주지 않고, 대신 설날과 추석 때마다 책을 한 권씩 골라 선물한다. 해마다 한 명에게 책을 두 권씩 선물하는 셈이다.

나는 회사를 다니다가 간간이 힘이 들어 쉬기도 했고, 그때는 남편의 수입으로 생활을 했고, 남편이 회사를 그만두었을 때는 내 수입으로 생활을 했다.

지금 나의 수입은 남편보다 훨씬 많다. 네 배도 넘는 차이 - 내가 많이 버는 게 아니라,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고 지금 하는 일(공인노무사 사무실 공동 운영) 자체가 수입이 매우 적어서이다 - 가 난다. 그래서 내가 지출을 많이 한다. 지금 두 사람은 비슷한 액수가 매월 들어가는 적금과 보험을 각자의 이름으로 가지고 있다.

통장은 각자가 관리한다. 둘 다에게 해당되는 비용(제세공과금, 통신비 등)은 모두 남편 통장에서 결제가 된다. 하나로 관리하는 것이 편리하기 때문이다. 전에는 내 통장에서 나가도록 되어 있었는데, 작년에 남편이 여러 가지 조건이 유리한 카드를 새로 만들면서 그쪽으로 옮겼다. 돈이 부족하면, 나보고 달라고 해서 결제한다.

그리고 각자가 필요한 비용은 각자 알아서 판단해서 지출하고, 그 액수가 크다거나 특별한 일일 경우에는 미리 의논한다. 예를 들면, 나는 올해 여름에 중국 동북 지방을 여행하는 고구려 유적 답사단에 참가했는데(남편은 안 가고 나 혼자서), 그 일을 위해 작년 11월부터 월 10만원씩 돈을 모으겠다고 남편에게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같이 생활 비용을 줄였고, 월 10만원씩 모은 것만 가지고는 실제 여행하는 데 모자랐기 때문에 앞으로 상당 기간은 계속 다른 지출을 줄여야 한다.

우리는 아직 가진 게 없어서인지 공동 명의로 할 만한 게 없다. 굳이 하나 있다면 전셋집 계약서인데, 공동 명의로 하지 않았다. 그냥 계약하러 간 사람 이름으로 했다. 지금 남편 이름으로 되어 있다고 해서 그게 남편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데, 예전에 내 이름으로 되어 있다고 전셋집이 내 것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과 같다. 만약 앞으로 집을 산다면 공동 명의로 하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은 든다. 그런데 우리 두 사람은 모두, 생산수단과 토지 따위 부동산은 사적인 소유가 철폐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실 전셋집도 자기 명의로 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 서로 상대방 이름으로 하라고 미루곤 하는데, 험한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 나가는 것은 현실이니, 그렇게 생각할 일만도 아니겠지.

공동명의실천상 부부공동재산명의가 가져온 가족평등문화


부부공동재산명의가 가져온 가족 평등문화


박 미 영

우리 부부는 95년 아름다운 가을날 야외 결혼식을 했다. 이제 결혼한지 만 7년이 되었다.
"단점을 개성으로 받아들이는 사랑과 존경이 넘치는 평등한 가족공동체를 만들자" 남편이 내게 청혼할 때 한 말이다. 물론 빈말이 아니었다. 남편은 나의 작은 장점은 크게 부각시켜서 자신감을 심어주고 단점은 개성으로 승화시켜서 기를 살려주었다. 그리고 아내, 어머니, 며느리 입장보다는 나를 한 개인의 인격으로 보고 어떻게, 무엇을 하면 좀더 값진 인생을 살까 진심으로 고민해 주었다.

그러나 문제도 컸다. 특히 가사노동분담이 그랬다. 결혼 후 처음 일주일씩 가사노동전담제를 했는데 문제가 생겼다. 내가 가사노동을 결혼 전까지 15년 이상 경험한 것에 비하면 남편은 결혼하기 전에 대부분 남자들이 그렇듯 가사노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남편이 청소와 빨래를 할 테니 식사는 나에게 전담하자고 제안을 했다. 나는 생각이 달랐다. 한두 달하고 그만 둘 일이 아니기 때문에 배우고 몸에 익혀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우리는 일주일 전담제를 계속했는데 남편이 당번 때는 반찬을 시장에서 사오는 거였다. 생각은 여느 남편보다 나은데 행동은 여느 남편만 못하는 것이었다.

가사노동에 대해서 남편의 자람은 더디었다. 그래도 가사노동전담이 틀이 잡혀가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첫아기(지연)를 출산하고 4개월이 되던 날 해고를 당했다. 하루아침에 전업주부가 되면서 가사노동을 전담하는 위치로 변했다. 내가 전업주부가 되고 남편이 하는 집안 일이란 가스렌지 청소와 쓰레기 치우는 것, 그리고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며 놀아주는 일 정도였다. 그나마 남편이 너무 바빠진 이후엔 시키지 않는다.

전업주부가 되면서 나 자신이 왜소해지는 것을 많이 느낄 수 있었다. 정신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내가 생각한 결혼은 그랬다. 경제력은 한사람에게 부담 지우지 말고 서로 나누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계획에 없던 해고를 당하면서 "아이는 유아일 때 부모의 사랑이 필요하므로 아이가 세 살 될 때까지 육아에 전념하자"고 생각했다. 그 사이에 둘째(서현)가 태어났고 서현이가 세 돌이 될 때까지 전업으로 육아를 하기로 하였다. 엄마 못지 않게 아빠의 관심과 애정도 중요하므로 남편도 하루 1시간씩은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그러나 남다를 노력에도 불구하고 잘 지켜지지는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이 가족의 희생 없이 성장 할 수 없음을 전업주부 생활을 통해 뼈저리게 느꼈다.

결혼하고 2번의 전세생활을 했다. 결혼 5년째 들어 또 다기 전셋집을 구하는 데 마침 불어닥친 전세대란으로 발이 붓도록 돌아다녀도 집을 구할 수 없었다. 우리는 큰 맘 먹고 관악산 아래 작은 아파트를 전매로 구입했다. 시부모님이 보태주시고 배보다 배꼽(대출금)이 더 컸지만, 그 기쁨이란...
처음 등기를 할 무렵 세무사에게 상담을 했다. 부부공동명의로 등기를 할 경우 세금을 내야한다, 서류가 복잡하다 등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특별한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남편에게 부부재산 공동명의를 제안했다. 처음에는 좀 주저되었다. 우리가 벌어서 집을 장만한 것도 아니고, 시부모님에게 도움을 크게 받았기 때문이다. 전업주부로 위축(?)이 많이 되었던 모양이다. 용기를 내어 남편에게 말했다.

"전업주부는 우리들이 상의하고 선택한 거예요. 경제적인 측면이랑 아이를 기르는 문제를 함께 고려해서 그러면 아이들이 좀 자랄 때까지 나는 집안일을 하자하고 지금까지 온건대 내가 한 가사노동을 인정 안 하면 안되죠" "재산 또한 부부공동생활 중 하나인데 남편이 죽으면 자식과 같은 위치에서 상속을 받는다는 것이 부부가 평등한 것이 아니지요?"
처음에 남편은 좀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나의 주장에 남편은 선선히 동의를 했고, 우리는 부부 공동명의로 재산등기를 했다. 2000년 10월의 일이다.

우리는 이 일을 계기로 사회에서의 양성평등만이 아니라 가족에서의 양성평등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로만이 아니라 가족 속에서 실천하는 양성평등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혼 초기의 "사랑과 존경이 넘치는 평등한 가족공동체"를 만들어 가자는 약속이 "부부재산 공동명의"로 열매를 맺은 것이다.
전업으로 아이들을 키우면서, 미래에 대해 초조해 하지 않고 즐거운 전업주부로 생활할 수 있었던 것에는 남편의 이해와 지지가 컸다. 육아문제는 개인, 가족단위에게 맡겨진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이며 그래야 양성평등의 날도 앞당길 수 있음을 5년의 전업주부 생활을 통해 절감했다. 올해 방송대학교 유아교육과를 졸업했다. 육아의 경력을 바탕으로 여성운동의 한 방향으로써 유아교육에 전망을 세우고 있다.
내년 3월이면 서현이가 세 돌이다. 나는 이제 전업주부 생활을 끝내고 일을 시작하려 한다.
그래서 올해는 자원봉사를 일주일에 하루하고, 그리고 내 공부를 하루씩하고 있다. 나는 결혼을 하고 난 후에 인생에 대해 이전보다 자신감을 갖고, 미래를 설계하고 있다.

공동명의실천상 부부재산 공동명의를 하고 나서


부부재산 공동명의를 하고 나서


조 영 임

나이 마흔 여섯의 주부로서 모든 여성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딸들과 살다보니 가정분위기가 아기자기하면서 재미가 솔솔 짭짤한데, 남편은 충청도 전형적인 한국 가정의 보수적인 사람으로 예절이라면 공자님도 놀랄 정도의 사람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는 뭐든지 남편의 명의로 해놓아야 안심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때로는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가 느껴져 불만을 비친 적도 있지만 아무런 결과도 없이 허전함을 삭히며 살았고, 세월이 흘러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갔다.

그러던 중에 집을 옮기게 되었고, 명의이전을 하려던 차에 남편은 느닷없이 우리 아이들이 결혼을 하면 집을 공동명의로 해야 한다면서 사위 앞으로만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공동명의를 하자고 해도 반대를 하던 사람이 자식 일에서는 현실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었다.

이번 기회에 나는 남편에게 느낀 점을 그대로 말했다.
"흔히 말하기를 선진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여성을 인격적으로 동등하게 대우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후진국에서는 여성들의 인격이 무시된다. 그러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여성이 행복하고 주부가 행복해야 가정이 행복하며 나라가 발전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우리 아이들이 결혼해 집을 공동명의로 하도록 하려면 아이의 주변에 있는 남성들부터 생각을 앞서주어야 할텐데 그러려면 아빠부터 공동명의를 실천해 현실에 맞추어 주어야 되지 않겠느냐" 고 말했더니 남편은 두말없이 집을 나와 남편의 공동명의로 하였다.
덕분에 남편은 나이는 많지만 신세대 아빠가 되었고 나에게는 든든하고 더 멋있는 남편으로 다가왔다.

그래서일까? 남편은 이전보다 모든 일들을 나와 상의를 해서 집에 관한 일들을 처리하였고, 무의식중에 나에게는 권리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남편에게 더 잘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단점이라면 책임감과 의무감 또는 가벼운 법률 상식이나 세무적인 상식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부들이 아니 여성들이 사회와 동떨어져 살고 있다는 느낌을 조금이나마 덜 느끼고 살려면 그 상식은 알고 있어야 하고, 여성단체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기관에 참여하는 것도 사회와 공존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 나라의 모든 여성들이며! 지금부터라도 집 장만을 할 때 가정과 남편을 위해서도 반드시 공동명의로 하기를 권한다.
물론 처음에는 보수적인 남성들이 비협조적일수도 있으나 다음에 나이가 들어서 무탈하게 잘 지켜온 날들을 생각하며, 부인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질 때가 있을 것이다.
남성들은 주위에서 체면 때문에 보증이나 갖가지 곤란한 상황들에 부딪치게 될 때가 종종 있고, 한순간에 집안을 몰락하게 하는 일이 많다. 그러한 일들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부동산을 부부공동명의로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본다.

평등결혼실천상 평등한 결혼을 준비하며

평등한 결혼을 준비하며


고 상 희

그와 나는 햇수로 4년 사귀고 결혼을 결정하였다. 서로에 대해 알만큼 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결혼하려 하니 조심스러운 게 너무 많았다. 시어머니, 친정어머니 의견이 어떠신지 제일 염려스러웠다. 그러나 현재 대한민국의 결혼 관행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의 결혼 준비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둘의 기대 수준에 맞는 상품, 서비스를 찾아서 비교하여 가장 좋은 가격으로 결정한다.
이 때 어른들의 마음에 거슬리지 않도록 조심한다. 부모님들에게 부담 드리지 않고 의지하지 않는다.
2. 소요 비용을 계산한다.
3. 50% 씩 부담한다.

우리가 준비한 것은 다음과 같다.
예식장, 드레스, 사진촬영, 메이크업과 헤어, 한복, 신혼여행, 예물, 가재도구 약간, 시댁 예단 등이다. 결혼식 관련 상품이 총 예산의 38%, 신혼여행이 25%, 예물예단이 25%, 가재도구 12%로 책정했다. (커플마다 취향이 다르고 의미 있게 생각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의 예산이 표준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비용을 50% 씩 나누어 내기로 했고 1인당 부담액은 7백여 만원이다.

신혼집 전세금은 소모되는 비용이 아니므로 형편 되는 사람이 좀더 내고 이에 대한 이자비용을 반씩 부담하기로 했다. 그가 직장 생활을 통해 모아놓은 돈이 하나도 없고 나도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부모님께 부담 드리지 않기 위해 부족한 자금은 차입을 통해 조달하였다. 회사, 친구들로부터 받을 부조금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와 더불어 부부의 권리와 의무에 평등을 보장하기 위해 우리는 부부재산 약정서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결혼 전의 자산부채 명세서를 작성하여 별첨할 것이며 이를 등기할 예정이다.

언젠가 신문과 텔레비전 뉴스에서 본 적이 있는 부부재산 약정서에 대해 알고 알고 있는 분들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러나 결혼을 생각하고 나의 앞날에 대해 생각하다가 이 제도를 생각하게 되었다.

국내 이혼율이 20%를 넘는다는 말이 실감이 나지 않지만 드라마, 영화뿐만 아니라 실제 주변에서 이혼하는 사례를 접하다 보니 나의 결혼에 대한 보호장치를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TV 드라마에서 조강지처를 버리고 떠나는 못된 남편들이 너무 자주 등장하자 이러한 일이 현실에서도,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넘 불안했다. 이에 대한 대비책이 무엇이 있을까?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다. 부부재산 약정서의 취지, 내용, 법적 보장 내용에 대해 알게 되었고 나에게 맞는 약정서를 작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보편적인 법리에 어긋나는 사항이나 부족한 점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 서울여성의전화에 이메일로 문의를 드렸고 친절한 상담을 받을 수가 있었다.

우리의 부부재산 약정서의 핵심은 배신하는 사람에게는 한푼도 주지 않으며 생활비와 양육비를 받아낸다는 것이다. 이를 보장하기 위해 재산에 대한 지분율을 아내가 60%, 남편이 40%를 가지는 것으로 명시하고, 부동산은 공동명의로 등기하거나 자산 비율에 맞게 나누어 등기한다고 기술했다. 부부가 상호 협의하지 않은 차입이나 담보제공, 보증제공은 원천적으로 막기로 했다. 자산 부채 관련 정보를 공유하고 공동 생활비에 각자 수입의 50% 이상을 제공하기로 했다.

한국 여성들, 아내들이 부당하게 대우받고 권리는 인정받지 못하고 의무만 강요당하는 상황이 나에게도 적용되는 현실이 아니길 바란다. 그와 나 각자의 집안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기대를 받으면서 자라왔다. 둘다 사회 성원으로서 열심히 일하고 인정받고 있다. 이렇게 동등하게 살아온 우리는 앞으로도 둘이 협력하여 평등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희망한다.